2026. 10. 15. 10:45ㆍ사람과 오래된 인연
50년 우정, 매년 7월 9일에 만나는 친구들
2026년 7월 9일. 이날은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과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친구들을 기억하며 만나는 날이다. 오전 11시, 부산영락공원.
우리의 인연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됐다. 벌써 50년이 넘었다. 한 명 한 명 모두 소중한 친구들이다. 각자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자면 밤을 새워도 다 하지 못할 것이다.
부자가 된 수근이, 운동을 좋아해 결국 체육관 관장이 된 태호, 그릇가게를 운영했던 창훈이, 원룸 두 채를 가진 정수, 아내와 같은 날 공무원 생활을 마친 익수, 술을 좋아하던 근수.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중학교 선생님 출신 상호와 종수, 영수가 있다.
이날 우리는 상호와 종수, 영수를 만나러 왔다.
모임에 참석한 친구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술을 좋아하던 근수와 그릇가게를 하던 창훈이는 참석하지 못했다.
내가 이 모임을 처음 만든 것은 우리 모두 환갑을 맞이하던 무렵이었다. 날짜를 매년 7월 9일로 정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숫자 7과 9를 붙여 **‘친구데이(7·9)’**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 친구 아이가!”라는 마음으로 이날만큼은 함께했던 지난날을 돌아보고 우정을 나누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한 모임이 벌써 10년에 가까워졌다.
나이가 들수록 인생이 덧없게 느껴지고 세월의 흐름도 야속하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어느새 작아 보일 때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진다. 그날은 먼저 떠난 친구 가운데 유독 영수와의 추억이 자꾸 떠올라 가슴이 아려 왔다.
흰밥 밑에 계란프라이를 숨기던 친구

영수는 고등학교 시절 집안 형편이 꽤 넉넉했다. 우리 대부분의 도시락에는 김치와 멸치볶음, 고추, 고추장 같은 반찬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영수의 도시락에는 흰밥 위에 늘 계란프라이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점심시간에 함께 밥을 먹으면 그 계란프라이는 친구들에게 금세 빼앗기곤 했다. 영수는 별다른 말 없이 친구들과 나누어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에 영수의 도시락을 열었는데 계란프라이가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영수는 계란프라이를 흰밥 밑에 뒤집어 숨겨 놓았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리는 더는 계란프라이를 빼앗아 먹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하면서도 그리운 청춘의 추억이다.
흰밥 밑에 계란프라이를 숨기던 그 착한 아이는 어른이 된 뒤에도 삶의 무거운 짐을 혼자 감추려 했던 것일까. 이제 와 생각하면 그때의 작은 장난마저 애틋하게 느껴진다.
함께 자취하며 나누었던 젊은 날의 우정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영수와 나는 부산 서면의 뒷골목에서 노가리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실컷 마시곤 했다. 그러다 각자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한동안은 마산 외곽의 전셋집에서 방 두 칸을 나누어 쓰며 함께 회사에 다녔다. 지금의 창원 지역이다.
그렇게 약 1년을 함께 살던 어느 날, 영수는 그 동네 아가씨와 결혼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참 묘한 인연이었다.
결혼 전 그 아가씨는 나에게 호감을 느껴 결혼 상대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함께 살던 친언니가 “아무리 생각해도 착실하고 월급도 많은 영수와 결혼하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다. 결국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나 역시 맞선을 본 뒤 3개월 만에 결혼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마산에서 생활하면서도 오랜 친구와의 우정을 이어 갔다.
하루 차이로 태어난 두 아들
어느 날 영수에게서 회사로 전화가 왔다. 그때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다.
“친구야! 우리 와이프 임신했다 아이가!”
영수는 무척 들뜬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나는 축하한다고 말한 뒤 장난스럽게 되받아쳤다.
“영수야, 우리 와이프도 임신했다 아이가!”
사실 나도 먼저 전화해 이 소식을 알리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성격 급한 영수가 한발 앞서 연락한 것이다. 우리는 그날 임신을 축하하며 통술집에서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또 하나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마산 어시장에서 배가 산처럼 불룩해진 아내와 영수의 아내가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을 멀찍이 뒤따르던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두 사람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서로 쿡쿡 웃었다.
얼마 뒤 두 집 모두 아들을 얻었다. 영수의 아들은 9월 27일, 우리 아들은 9월 28일에 태어났다. 생일이 딱 하루 차이였다. 아이들까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으니 우리 가족의 인연도 남달랐다.
우리 부부는 마산에서 잘 지내다가 내가 부산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생활이 달라졌다.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느라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그래도 오랜 친구라는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퇴사와 가구점 실패, 무거워진 삶의 짐
그러던 어느 날, 영수가 회사의 구조조정 대상이 되어 퇴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규모가 작은 회사로 옮겼지만 그곳에서도 1년 만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취업은 쉽지 않았다. 한동안 쉬던 영수는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걸어 뭔가를 시작해야겠다고 말했다. 모아 둔 돈을 긁어모아 가구점을 차리겠다는 것이었다. 가구점 운영 경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영수를 말렸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러냐. 가구점을 차리려면 직접 일도 해 보고, 장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파악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시작해도 늦지 않을 텐데 참 걱정된다.”
하지만 영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가구점은 1년 2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보증금은 사라졌고, 아파트 추가 대출 이자에 친척들에게 빌린 돈까지 갚아야 했다. 영수에게는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술을 마시는 날이 잦아지면서 몸도 점점 나빠졌다. 통풍 때문에 복숭아뼈 부위에 극심한 통증이 생겼고, 진통제에 의지하며 지내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이별, 아직도 가슴에 남은 친구
그러던 어느 날, 영수의 아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영수가 수면제와 진통제를 과다 복용한 뒤 심장 쇼크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전화를 받는 순간 내 심장까지 멎는 듯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여리고 착했던 친구가 먼저 떠났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 슬픔은 오랫동안 가슴 깊이 남았다.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나는 가끔 영수의 아내에게 연락했고, 그녀 역시 안부를 전해 왔다. 그 많던 빚도 어느 정도 갚았다며 마트 계산원으로 일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어느 날 그녀가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말수도 줄고,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아요.”
나는 걱정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나아질 테니, 제수씨 몸부터 잘 챙기세요.”
그러던 어느 날 밤, 다시 전화가 왔다. 아들이 독립하겠다며 서울로 가겠다고 해서 2,000만 원을 마련해 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오랫동안 푼푼이 모아 온 돈을 아들에게 내어 주고 나니 걱정이 앞선다며 그녀는 울먹였다. 나는 조금 더 기다려 보자며 마음을 달래 주었다.
남겨진 아내에게 찾아온 새로운 인연
며칠 뒤, 그녀가 부산으로 찾아와 의논할 일이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남편을 떠나보낸 뒤 힘든 시간을 보내던 그녀는 약 7년 전 지인의 소개로 한 남자를 알게 되었고, 지금은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결혼식을 올릴 생각은 없다고 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물어보니, 10년 전 아내와 사별한 퇴직 공무원이라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도 모르게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는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더라도 혼인신고만큼은 해 주고 싶어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남자의 두 딸이 강하게 반대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재산 문제가 달라질까 걱정했던 모양이다.
친구의 아내는 딸들과 그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좋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혼인신고 같은 건 필요 없으니, 당신을 잘 보살피며 남은 여생을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남자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다음 날이 그 남자의 사별한 아내 기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녀는 그와 함께 밀양에 있는 납골당을 찾았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영정 앞에서 조용히 말했다고 한다.
“애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는 제가 곁에서 잘 모시고 있을 테니 아무 걱정 마세요. 먼 훗날 하늘에서 애들 아버지를 만나면 반갑게 손잡아 주세요.”
그 후 두 사람은 함께 부산영락공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영수가 꿈에 나타났을 때 이곳을 한 차례 찾았고,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라고 했다.
나는 두 사람이 남은 여생을 서로 의지하며 잘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영수야, 우리는 매년 너를 기억할 것이다
제수씨는 영수의 영정 앞에 하얀 꽃을 조용히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제는 자주 오지 못할 테니, 하늘에서는 아프지 말고 잘 있어요.”
그녀는 깊은 마음을 담아 기도했다.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이 조용한 목소리에 실려 흘러나왔다.
영수야.
네가 떠난 뒤 남겨진 사람들이 이렇게 모진 시간을 견디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그래도 네가 사랑했던 제수씨 곁에 이제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는 좋은 사람이 생겼으니, 하늘에서는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그 무거운 짐은 이제 모두 내려놓고, 먼저 간 상호와 종수와 함께 편히 쉬어라.
우리는 백발이 되어서도 매년 7월 9일이면 너희를 기억할 것이다. 함께 웃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서로의 삶을 걱정하던 그 시절을 잊지 않을 것이다.
영수야, 우리의 청춘이자 눈부셨던 내 친구야.
정말 그립고, 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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