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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얌전해 보이는 여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좀 조용히 하세요. 이런 양아치 같은 사람이 있나.”
뒷자리에서 큰소리로 떠들던 남자를 향해 쏘아붙인 말이었습니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 사람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말렸습니다.
그날 처음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뒤에는 그 사람과 남지 유채꽃밭을 같이 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산으로 돌아올 때는 원래 타고 왔던 관광버스도 타지 않았습니다.
둘이 남지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걸어가 부산행 시외버스를 탔습니다.
처음 가본 묻지마 관광에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나도 몰랐습니다.

회비 5만 원 내고 처음 타본 관광버스
동네 목욕탕에서 만나 동생처럼 지내는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일요일에 부산 동래역으로 가자고 하더군요.
하루치기로 다녀오는 관광이 있는데 같이 가자는 겁니다.
사실 코로나가 오기 전에도 다른 친구와 한 번 가기로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데를 혼자 가는 게 쑥스러워서 가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친구도 같이 간다니 한번 가보자 싶었습니다.
회비 5만 원을 내고 45인승쯤 되는 관광버스에 올랐습니다.
4월 중순이었는데 그날따라 날씨가 꽤 쌀쌀했습니다.
아침 8시 30분쯤 버스가 출발했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27명 정도가 타고 있었습니다.
총무가 출석을 확인하고 생수 한 병씩 나눠준 뒤 간단하게 일정을 설명했습니다.
나는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조금 어색했습니다.
그런데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뒷자리에서 한 남자가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술을 조금 마신 것 같기도 했습니다.
목소리가 워낙 커서 나도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때 내 옆에 앉은 사람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좀 조용히 하세요. 이런 양아치 같은 사람이 있나.”
순간 버스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그 남자는 처음에는 씩씩거리더니 이내 풀이 죽어 조용해졌습니다.
내 옆 사람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저런 사람은 처음부터 한마디 해야 돼요. 가만히 있으면 버스 타고 가는 내내 시끄럽게 해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참 대단한 사람이네.’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자기 할 말을 확실하게 하는 모습이 조금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남지 유채꽃밭에서 하루의 파트너가 됐습니다
그날 우리가 간 곳은 남지 낙동강변이었습니다.
유채꽃 행사 기간이라 관광객도 많았습니다.
나는 이런 관광을 처음 와본 터라 어디로 가야 할지도 조금 어색했습니다.
그런데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그 사람이 어느 순간 내 하루의 파트너가 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과 하루 종일 같이 돌아다닌다는 게 나에게는 꽤 생소한 일이었습니다.
같이 온 목욕탕 친구는 옆에서 자꾸 훈수를 뒀습니다.
“겁먹지 말고 당당하게 해라.”
그러면서 재산도 좀 있고 퇴직해서 연금도 나온다는 이야기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실제보다 조금 부풀려서 내 형편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상했습니다.
상대방의 표정이 너무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오히려 내가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아, 이거 괜히 허세 부렸구나.’
결국 나는 바로 꼬리를 내렸습니다.
그 사람이 속으로 나를 얼마나 줏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 뒤부터는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유채꽃밭을 걸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침부터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한 번도 벗지 않길래 내가 물었습니다.
“선글라스는 왜 하루 종일 쓰고 있어요?”
그때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낙동강을 바라보던 벤치에서 들은 이야기
한참 걷다가 낙동강을 바라보는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주었습니다.
한쪽 눈이 많이 좋지 않아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제야 나는 아침부터 선글라스를 한 번도 벗지 않았던 이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렇게 불편하게 지내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어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나왔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을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미 이렇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잖아요. 아직 살 날도 많이 남았는데, 남은 시간은 재미있게 살아야지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무슨 대단한 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날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관광버스 대신 시외버스를 탔습니다
그날 우리는 결국 관광 일정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원래 타고 돌아가기로 했던 관광버스를 타지 않았습니다.
둘이 남지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부산행 시외버스를 탔습니다.
관광버스에서는 옆자리에 앉았던 사이였는데, 돌아올 때는 둘이 나란히 앉아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도 말없이 창밖을 보았습니다.
참 이상한 하루였습니다.
아침에는 서로 이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동안 같이 걷고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버스까지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날 유채꽃이 얼마나 예뻤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떤 곳을 구경했는지도 지금은 자세히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낙동강을 바라보던 그 벤치는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 사람의 선글라스도 기억납니다.
그리고 관광버스 대신 시외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오던 길도 기억납니다.
회비 5만 원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5만 원을 내고 떠난 관광이었지만, 내 기억에 남은 것은 관광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날 처음 만난 사람과 나눈 몇 시간의 이야기가 더 오래 남았습니다.
그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되고, 나도 내 이야기를 조금 하고, 함께 걷다가 함께 시외버스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참 이상합니다.
몇십 년을 알고 지낸 사람도 어느 순간 멀어질 수 있고,
반대로 몇 시간밖에 만나지 않은 사람이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합니다.
그날 내가 만난 사람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지만 가끔 생각납니다.
아마 그 사람도 어느 날 낙동강변을 지나거나 남지 유채꽃 이야기를 들으면 그날의 일이 한 번쯤 생각나지 않을까요.
나에게는 그날이 그랬습니다.
유채꽃보다 그 사람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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