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0. 11. 10:20ㆍ일상

옛 직장 후배에게 보험 하나 가입해 달라는 말을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보고 앉으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제대로 권하지도 못하고 일어서려 했습니다.
그때 후배가 내 주머니에 봉투 하나를 밀어 넣었습니다.
“선배님, 이거 가져가세요.”
괜찮다고 했지만 후배는 거듭 받으라고 했습니다.
밖으로 나와 봉투를 열어봤습니다. 5만 원짜리 두 장, 모두 10만 원이었습니다.
보험을 권하러 갔다가 오히려 후배에게 돈을 받아 나온 것입니다. 고맙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습니다.
60대 후반에 보험설계사 일을 해보겠다고 나섰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가입을 권유받던 내가, 권유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처음부터 보험설계사가 되려고 알아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친구 사무실에 놀러 갔다가 상조 관련 일을 한다는 팀장을 만났습니다. 말도 잘하고 붙임성도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몇 차례 만나는 사이 그 팀장은 월 1만 5천 원 정도를 내는 상품을 권했습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거절했지만, 처음 1년 정도는 본인이 대신 납부하겠다는 취지의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때 나는 그 제안의 조건이나 관련 규정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실적 때문에 그러는가 보다 생각하고 가입했습니다.
두 달쯤 뒤에는 월 3만 원 정도의 크루즈 관련 상품도 권했습니다. 그것도 가입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매달 나가는 돈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만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더니 이번에는 보험 일을 한번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직장생활도 오래 했고 컴퓨터도 어느 정도 다룰 줄 아니 해볼 만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보험 일을 하나.’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돈을 벌 수 있다면 좋겠고, 새로운 일을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교육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가입을 권유받던 사람이 어느새 다른 사람에게 가입을 권하는 일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시험에 붙고 나서야 어려운 일이 시작됐습니다
내가 참여한 교육 과정에는 서른 명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부분 나보다 젊어 보였습니다. 갓 퇴직한 남성도 있었고 나와 비슷한 연배의 수강생도 있었지만, 나는 나이가 많은 편이었습니다.
한번 시작했으니 끝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수업을 들었습니다. 약 3주 뒤 시험에 합격했고, 이후에도 보름 정도 교육을 더 받은 뒤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시험에 붙었을 때는 큰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보고 문제를 푸는 일과 아는 사람 앞에서 보험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달랐습니다.
‘나를 부담스러워하면 어쩌지.’
‘오랜만에 찾아와서 이런 부탁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상품을 설명할 생각보다 상대의 반응을 먼저 걱정했습니다. 시험에 합격했다고 영업할 자신감까지 생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밤에 누우면 친구와 가족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활동을 시작하자 실적을 내야 한다는 부담이 생겼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가입을 권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처음에는 나와 아내 명의로 가입했습니다. 첫 고객을 밖에서 찾지 못하고 가족 안에서 만든 셈입니다.
밤에 누우면 친구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옛 직장 동료와 친척들도 생각났습니다.
‘누구에게 한번 이야기해볼까.’
그렇게 사람 이름을 하나씩 떠올리다 잠들기도 했습니다.
아들에게도 부탁했습니다. 아들은 처음부터 이런 영업이 내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가입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계속 부탁하자 결국 적은 금액으로 하나 가입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에게 정말 필요한 계약이었는지보다 내 실적을 부탁했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사이라 부탁하기 쉬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일수록 거절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후배 앞에서 내 마음이 먼저 작아졌습니다
친한 후배를 찾아갔다가 보험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술만 마신 채 돌아온 날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또 다른 옛 직장 후배를 찾아갔습니다. 예전에 가깝게 지냈던 후배였습니다.
찾아갈 때는 이번에는 꼭 이야기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마주 앉으니 또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후배의 얼굴을 보며 혼자 생각했습니다.
‘달리 할 일이 없어 이런 일을 하나 싶어 하는 건 아닐까.’
후배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때 내 마음이 그만큼 위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보험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때 후배가 봉투 하나를 내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선배님, 이거 가져가세요.”
후배는 자기에게도 보험 이야기를 하러 오는 선후배들이 많다면서, 다음에는 자신도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괜찮다고 했지만 거듭 받으라고 하기에 결국 봉투를 받아 나왔습니다.
밖에서 열어보니 10만 원이었습니다.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 처지가 민망해 한동안 봉투만 바라봤습니다.
10만 원의 절반은 친척집 과일이 됐습니다
그길로 과일가게에 갔습니다.
후배에게 받은 10만 원 가운데 5만 원으로 과일을 샀습니다. 그리고 평소 자주 찾아가지 못했던 친척집에 들렀습니다.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 이야기와 자식들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나도 보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 순간 친척의 표정이 조금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몇 달 뒤 만기가 되는 보험이 있으니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 말이 실제 계획이었는지, 당장 대답하기 어려워 미룬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집을 나오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반가운 친척으로 다녀온 걸까, 보험을 권하러 온 사람으로 남은 걸까.
안부가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계약을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후배에게 받은 돈의 절반은 이미 과일이 되어 친척집 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날도 계약은 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사람을 찾아가 부탁한다는 일이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다시 느꼈습니다.
계약은 없었지만 고마움은 남았습니다
보험 일을 해보며 알게 됐습니다.
오래 직장생활을 했다고 새로운 영업까지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는 사람이 많다고 계약이 따라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보험 가입을 권하는 일이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상대의 거절을 내 처지에 대한 평가처럼 받아들이곤 했습니다.
그러니 입을 열기도 전에 마음이 작아졌던 것 같습니다.
후배가 왜 돈을 건넸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모릅니다. 선배를 도와주고 싶었을 수도 있고, 빈손으로 보내기 마음이 쓰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을 내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날 후배가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봉투를 건네던 모습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다시 그 후배를 만나면 보험 이야기보다 먼저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날 참 고마웠다.”
그날 계약서는 쓰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후배가 건넨 봉투와 그때의 고마움은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 이 글은 보험설계사 활동을 하며 겪은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대화와 기간, 금액은 당시 기억을 바탕으로 기록했으며, 특정 회사나 상품의 가입·유지·해지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앞부분의 상조·크루즈 관련 상품을 보험 상품과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려는 뜻도 아닙니다.
※ 이미지는 글의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AI로 제작했으며, 실제 인물이나 현장 사진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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