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0. 10. 17:35ㆍ몸과 건강을 겪으며
누구나 가슴속에는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작은 열등감 하나쯤 품고 살아갑니다. 세월의 흐름 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요. 어느덧 기력은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친구의 무심한 한마디에 자존심이 발동한 나는 평생 가 본 적도 없던 헬스장이라는 낯선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늘 뒷산 체육공원에서 흙바람을 맞으며 대충 몸을 풀던 나였습니다. 그런 내가 에어컨이 시원하게 돌아가고 젊은이들이 활기차게 운동하는 세련된 헬스장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그 충격은 꽤 컸습니다.
“아, 돈이 좋긴 좋구나.”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두 달쯤 지나자 거울 속 내 모습에도 조금씩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볼록하던 배가 살짝 들어갔고, 젊은 회원들이 러닝머신 위에서 힘차게 달리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일상에 활력이 돌았습니다. 또래 회원들은 물론 젊은 여성 회원들과 음료수를 나누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도 미묘한 경쟁과 서열 의식은 존재했습니다.
나이에 비해 단단한 근육을 자랑하고 훤칠한 외모까지 갖춘 김 사장은 특히 60대 여성 회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만날 때마다 자신이 해군 특수부대인 UDT 출신이라며 무용담을 늘어놓았고, 여성 회원들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솔직히 속이 조금 쓰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질투가 났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그를 치켜세우며 씁쓸한 마음을 달래곤 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진 하얀 거짓말
그러던 어느 날, 헬스장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정 여사님이 내게 다가왔습니다.
환갑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세련된 커트 머리에 빨간 반바지까지 멋지게 소화하는 모습은 흡사 시니어 모델을 연상케 했습니다.
“사장님은 언제 퇴직하셨고, 원래 직업이 뭐였어요?”
그녀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순간적으로 평정심이 무너졌습니다. 늘 주목받는 김 사장과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던 자격지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던 것입니다.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점잖다는 말을 제법 듣던 터라, 나름대로 선비처럼 품위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왔습니다.
“경남의 한 시골 중학교에서 교감으로 퇴직했습니다.”
한 번 내뱉은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날 이후 헬스장에서 내 별명은 공식적으로 ‘교감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생활스포츠지도사 1급 자격증을 보유한 정 여사님은 내가 어쩐지 순진해 보인다며 자처해서 전담 지도자처럼 따라붙었습니다. 요가 동작부터 스트레칭까지 하나하나 짚어 가며 정성스럽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기도 하고, 잘 보이고 싶기도 했습니다. 나는 냉커피를 대접하며 헬스장에 가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들어 낸 가짜 권위가 오히려 나를 옥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허영 속에서 달콤한 우월감까지 즐기고 있었던 셈입니다.
들통난 허세, 뜻밖의 의리
비밀은 영원히 묻어 둘 수 없는 법입니다. 사건은 김 사장과 소주잔을 기울이던 날 밤에 터졌습니다.
우연히 합석한 김 사장의 사촌 동생이 술김에 폭탄 발언을 던졌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김 사장과 쌍둥이처럼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형님, 군대에서 취사병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참 세월 빠릅니다!”
순간 김 사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습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의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게 해 주려고 얼른 소주잔을 채우며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습니다.
“어이, UDT! 취사병도 특수부대 사람들 밥해 먹이려면 보통 고생이 아닌데, 자, 원샷합시다!”
알고 보니 진짜 UDT 출신은 한 살 아래인 사촌 동생이었고, 김 사장은 평범한 취사병 출신이었던 것입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우리는 이내 배를 잡고 껄껄 웃었습니다. 그 기세를 몰아 나 역시 백기를 들었습니다. 공기업 관리직으로 퇴직했으며, 교감은커녕 교육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거짓말이라는 게 참 묘합니다. 한 번 탈을 쓰고 나면 내려놓기가 오히려 더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마치 거대한 비밀을 공유한 공범이라도 된 듯했습니다.
“에라, 늙어 가는 마당에 헬스장 안에서는 죽을 때까지 UDT와 교감 샘으로 가는 거야!”
그날 이후 우리는 서로를 향해 당당하게 “어이, UDT!”, “어이, 교감 샘!”을 외쳤습니다. 들통난 허세를 웃음으로 덮은 채 오히려 더 끈끈한 사이가 되어 운동에 매진했습니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순간
그러던 어느 날, 헬스장의 마스코트 같던 정 여사님이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집 화장실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갈비뼈 세 개가 부러지고 이마를 여덟 바늘이나 꿰매는 큰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복숭아 통조림과 요구르트를 사 들고 병문안을 갔습니다.
병실 침대에 누워 있던 정 여사님은 일주일 뒤면 퇴원한다며, 당분간 나를 직접 가르쳐 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조용히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습니다. 그녀는 내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습니다.
“교감 선생님요, 제가 경남 밀양에서만 35년을 살아서 눈 감고도 다닐 정도로 동네를 손바닥 보듯 잘 압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교감으로 퇴직하셨다는 그 학교 교장 선생님이 제 이종사촌 오빠라 지금도 아주 가깝게 연락하고 지내요. 그렇지만…… 내가 다 낫고 헬스장에 가면, 앞으로도 변함없이 ‘교감 샘’으로 불러 드릴게요.”
청천벽력 같은 그 한마디에 내 얼굴은 순식간에 시뻘게졌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진심으로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어쩐지 생활스포츠지도사 1급 자격증을 가진 분이라더니,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눈치도 특급이구나!’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헛웃음만 새어 나왔습니다.
나이 일흔이 되어서도 부질없는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벌인 치졸한 거짓말을, 정 여사님은 단 한 번의 훈계도, 창피를 주는 말도 없이 다정하게 감싸 안아 준 것이었습니다.
병원 문을 나서며 서늘한 바람을 맞으니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변함없이 교감 샘으로 불러 드릴게요.”
그 다정한 목소리는 늙어 가는 남자의 초라한 허세를 야단치는 대신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어른의 깊은 배려였습니다.
야속하면서도 고마웠고, 부끄러우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습니다. 그렇게 복잡한 여운을 안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습니다.
진짜 어른다운 품격이란
돌이켜 보면 나는 남보다 조금 더 나아 보이고 싶어 엉뚱한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정 여사님은 그 허세를 들춰내 망신을 주는 대신, 내가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닫고 웃어넘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자존심과 허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누군가의 부족함을 알아차렸을 때 그것을 굳이 들춰내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 줄 수 있다면, 그 마음이야말로 진짜 어른다운 품격이 아닐까요.
나는 오늘도 그때를 떠올리면 웃음이 납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정 여사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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