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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눈을 뜨면 책상 위에 놓인 약병과 작게 포장된 알약들이 먼저 보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내 주변에 늘어난 것 중 하나가 약입니다.
반대로 통장 잔고와 몸의 힘은 자꾸 줄어드는 것 같아 가끔 겁이 납니다.
약은 늘어나고, 주름도 늘어나는데 통장 잔고와 근력은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요즘 내 모습을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노인의 아침, 약병이 먼저 인사합니다
병에 들어 있는 약도 있고 하루치씩 작게 포장된 약도 있습니다.
머리맡에도 있고 식탁에도 있습니다.
하나둘 모이다 보니 집 여기저기에서 약이 보입니다.
늘어나는 것은 주름과 약이고, 줄어드는 것은 잔고와 근력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즘 내 모습을 보면 그 말이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50대 말에 대장암 3기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도 했습니다.
그 일을 겪은 뒤부터 병원과 약이 예전처럼 낯설지는 않게 됐습니다.
그런데 약을 계속 보고 있으면 가끔 이런 생각도 듭니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약과 같이 살아야 하나.’
그러던 중 열흘쯤 전 뒷산을 걷다가 내 또래 남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병문안은 갔지만 병원 갈 일은 없었다는 사람
뒷산 체육시설에서 만난 사람인데, 자기가 이곳 운동시설 대장이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자기 말로는 70살이 넘도록 큰 감기 한번 안 걸렸고, 술도 잘 마신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 병문안은 가봤지만 자기가 아파서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은 기억은 거의 없다는 겁니다.
나는 솔깃했습니다.
“도대체 비결이 뭡니까?”
그 사람이 어릴 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아버지가 사슴농장을 했고, 어릴 때 사슴피와 녹용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팩으로 나오는 녹용을 먹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이 자기 건강에 대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이 녹용을 먹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건강했다는 것을 내가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가 며칠 동안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통장 잔고 55만 6천 원, 내가 알아본 녹용은 55만 원
결국 집에 와서 아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뒷산에서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녹용 좀 사주면 안 되겠냐고 엄살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 운동이나 열심히 하세요.”
사람마다 몸도 다른데 남이 좋다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무턱대고 먹으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차라리 자기가 소고기 한 근을 사주겠다고 합니다.
전화를 탁 끊는데 나는 어린 노인이 된 것처럼 괘씸하기도 하고 조금 서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휴대폰을 열어 예금 잔고부터 확인했습니다.
통장 잔고 556,000원.
내가 알아본 녹용 가격 550,000원.
사고 나면 6,000원이 남는 계산이었습니다.
연금이 들어오는 날은 25일인데 아직 7일이나 남았습니다.
녹용 한번 먹어보겠다고 통장에 6,000원 남겨놓고 일주일을 살 수는 없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또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들으니 한번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건강 이야기를 듣고 내 통장 잔고까지 들여다본 내가 조금 우습기도 합니다.
다시 뒷산에 갔는데 그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4일 뒤 다시 체육공원에 갔습니다.
녹용은 어디서 구하는지 조금 더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다시 가도 없었습니다.
주변에 물어보니 며칠 전 그 사람이 병원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병원에 간 일이 녹용과 관계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건 내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정신이 조금 들었습니다.
며칠 전까지 나는 그 사람이 건강하다는 말만 듣고, 그 사람이 먹었다는 것을 나도 사려고 통장 잔고까지 확인하고 있었던 겁니다.
남의 건강 경험 하나를 내 몸의 정답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겁니다.
그날 나는 녹용을 사려던 생각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평소 다니던 병원에 들러 이전 검진 뒤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들에게 전화해 녹용은 안 사기로 했으니 약속했던 고기나 사달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웃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약 세 통을 갈아 화단에 뿌려버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어제와 똑같이 약들이 눈앞에 떡 버티고 있었습니다.
영양제 하나를 먹다가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아, 이게 내 일상인가. 내가 약의 노예가 된 건가.”
그 생각에 집 안 여기저기에 있던 약을 전부 꺼내봤습니다.
5년 전부터 있던 것, 3년 전부터 있던 것,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것, 외국어가 적힌 것, 포장도 뜯지 않은 것까지 나왔습니다.
비타민과 각종 영양제도 있었고, 먹다가 남겨둔 약도 있었고, 기한이 지난 것도 많았습니다.
왜 그때그때 정리하지 않고 이렇게 모아두고 살았나 싶었습니다.
다만 현재 의사의 처방에 따라 먹고 있는 약은 건드리지 않고 따로 옆에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기한이 지났거나 복용이 끝난 뒤 집에 남아 있던 약들을 모았습니다.
그때 내가 엉뚱한 짓을 했습니다.
약 포장을 뜯고 모아 믹서기에 갈았습니다.
한 통, 두 통.
세 통이나 갈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담아 아파트 화단에 확 뿌려버렸습니다.
“아픔이여, 안녕.”
그때는 정말 속이 후련했습니다.
약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동안 아팠던 시간까지 한꺼번에 버린 것 같은 기분이 잠깐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약은 그렇게 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화단에 뿌린 건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 부분은 분명히 말해두고 싶습니다.
내가 한 행동을 따라 하면 안 됩니다.
나는 그때 폐의약품을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폐의약품 배출 방법을 찾아보니 약의 종류에 따라 적절한 배출 방법이 다르고, 지역마다 지정된 수거함이나 배출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약 세 통을 믹서기에 갈아 화단에 뿌렸습니다.
그날은 속이 후련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약을 그렇게 버린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때 조금만 알아봤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앞으로는 남아 있는 약을 마음대로 버리지 않고, 지역에서 안내하는 폐의약품 수거 방법에 따라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약을 버리는 것과 약을 끊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날 오래된 약을 정리했다고 해서 현재 의사가 처방해준 약까지 내 마음대로 끊은 것은 아닙니다.
약이 많다고 해서 모두 나쁜 것도 아니고, 약을 먹는다고 해서 내가 약한 사람이라는 뜻도 아닐 겁니다.
내 몸에 필요한 약이 있을 수도 있고, 이제는 필요하지 않은 약도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내가 기분 내키는 대로 결정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앞으로는 먹어야 할 약과 오래되어 남아 있는 약을 제대로 구분하고, 필요하지 않은 약은 적절한 방법으로 처리해야겠습니다.
내가 버려야 했던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내일 아침에도 눈을 뜨면 약병들이 또 먼저 보일 겁니다.
아마 당분간은 약과 함께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약을 볼 때마다 겁부터 내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뒷산에서 만난 그 사람이 정말 왜 건강했는지는 나는 모릅니다.
녹용 때문인지, 운동 때문인지, 타고난 체질 때문인지, 아니면 여러 가지가 우연히 겹친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나에게 맞는 건강법은 결국 남의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살피면서 찾아야 할 겁니다.
그날 나는 녹용을 사지 않았습니다.
대신 집에 쌓여 있던 약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날 내가 버려야 했던 것은 약 자체가 아니라, 남의 건강 자랑 한마디에 내 몸의 답까지 찾으려 했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약은 늘어날 수 있습니다.
통장 잔고와 근력은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남의 말을 듣고 내 몸까지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
내가 먹는 약 하나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어쩌면 그것부터가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자기 몸을 돌보는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제가 실제로 겪은 일을 바탕으로 쓴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입니다. 특정 건강식품이나 치료 방법을 권하는 글이 아니며, 복용 중인 약의 중단이나 변경은 개인의 판단으로 하지 않고 의료진과 상의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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