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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삶

어머니 임종을 못 본 아들, 부산추모공원에서 30년 피운 담배를 끊었다

dobadalife 2026. 8. 10. 10:19

목차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나는 곁에 없었다. 늦게까지 친구들과 술을 마셨고, 결국 임종을 보지 못했다. 장례를 마친 뒤 먼저 가신 아버지 곁에 어머니를 모시려고 부산추모공원에 갔다. 두 분이 나란히 계신 자리 앞에서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약 30년 동안 피운 담배를 끊겠다고 맹세했다. 끊기 직전에는 하루 두세 갑이 보통이었던 담배였다. 사람들은 내 의지가 대단하다고 했지만, 내게 금연은 건강을 위해 세운 계획이 아니었다. 살아 계실 때 외면했던 어머니에게 너무 늦게 한 약속이었다.

    병든 어머니가 싫어 집에 늦게 들어갔다

    어머니는 치매로 약 5년을 지내셨다. 어느 날 낙상한 뒤 고관절 부근에 금이 간 것도 모르고 집에서 한참을 고생하셨다. 뒤늦게 병원에 모셨지만 의사는 연세가 많아 수술이 어렵다며 집에서 간호하는 편을 권했다. 그렇게 다시 집으로 모시고 온 뒤 열흘가량을 더 버티시다가 돌아가셨다.

    나는 그 열흘 동안 어머니 곁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회사가 바쁘고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솔직히 병든 어머니의 모습을 마주하기가 싫었다. 집에 들어가면 아픈 어머니를 봐야 한다는 생각에 일부러 늦게까지 밖에 있었던 것 같다.

    친구나 직장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고스톱이나 포커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술에 취해 늦게 들어가면 어머니를 오래 보지 않아도 됐다. 그때의 나는 그것을 잠깐 숨을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남은 시간이 열흘뿐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그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나는 나를 참 나쁜 아들이었다고 말한다. 누가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다. 어머니가 아프기 전에는 당연하게 받았던 밥과 걱정, 말없이 챙겨주던 마음을 병이 든 뒤에는 부담처럼 느꼈다. 나이 들어 돌아보니 병든 모습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을 감당하지 못하는 내 마음이 약했던 것 같다.

    임종도 못 본 채 아버지 곁에 어머니를 모셨다

    부모님 산소에 있는 비섯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에도 나는 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마지막 숨을 지키지 못했고, 어머니가 가시는 순간에 손 한 번 잡아드리지 못했다. 연락을 받고 난 뒤에는 이미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내가 그 시간에 어디에 있었는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장례를 마친 뒤 어머니를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 곁에 모셨다. 장소는 부산추모공원이었다. 두 분을 나란히 모시고 그 앞에 서자 살아 계실 때 하지 못한 말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미안하다고 말해도 들으실 수 없었고, 다시 잘 모시겠다고 약속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정했다. 담배를 끊는 것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동네 형에게 배워 피우기 시작한 담배였고, 약 30년 동안 내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끊기 전에는 하루 두세 갑을 피우는 날도 흔했다. 밥을 먹은 뒤에도, 술자리에서도, 화장실에 갈 때도 담배를 찾았다.

    그런 담배를 어머니를 모신 자리 앞에서 끊겠다고 맹세했다. 거창한 금연 계획도 없었고, 날짜를 골라 미리 준비한 것도 아니었다. 그날부터 피우지 않는 것만이 내가 어머니에게 보여드릴 수 있는 사과처럼 느껴졌다. 담배 한 개비를 참는 일이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잘못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 약속만큼은 다시 어기고 싶지 않았다.

    하루 두세 갑보다 힘들었던 금연 첫 3개월

    처음 3개월이 가장 힘들었다. 친구나 직장 동료들과 술을 마시는데 바로 옆에서 담배 냄새가 올라오면 손이 허전했다. 예전 같으면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냈을 순간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술맛보다 담배 생각이 더 강하게 올라오는 날도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 갈 때도 힘들었다. 오랫동안 담배와 함께 반복한 습관이라 눈을 뜨자마자 생각이 났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이렇게 자주, 이렇게 자동으로 찾아오는지 끊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결정했다고 몸까지 바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부산추모공원에서 한 맹세를 떠올렸다. 다른 사람과 한 약속이었다면 한 번쯤 핑계를 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 앞에서 한 약속은 다시 가서 바꿀 수도, 없던 일로 돌릴 수도 없었다. 한 개비만 피우자는 마음이 들면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그날까지 함께 떠올랐다.

    주변에서는 나를 지독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게 많이 피우던 사람이 어떻게 한 번에 끊느냐고 물었다. 나도 신기했다. 내가 원래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면 진작 끊었을 것이다. 금연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건강 걱정을 들어도, 가족이 냄새를 싫어해도 담배를 놓지 못했다. 내 힘만으로 끊었다기보다 어머니에게 진 빚을 생각하며 하루씩 버틴 것에 가까웠다.

    담배가 당길 때 어머니가 사준 수학책이 생각났다

    금연하던 3개월 동안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고등학생 때 내 방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어머니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아버지에게 알려지면 크게 혼날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일러바치지 않았다. 잘못한 아들을 감싸주셨고, 나는 그 마음을 고마워하기보다 다음 담배를 피울 궁리부터 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순한 분이었다.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셨다. 그런데 내가 학교에서 필요하다고 하면 방정식이나 인수분해를 공부하는 수학책을 사라며 몰래 모은 돈을 쥐여 주셨다. 책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모르셔도 아들이 공부할 때 필요한 것이라는 말은 믿으셨다. 나는 그 돈을 받으며 어머니가 어떻게 모았는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담배 생각이 날 때 떠오른 것은 거창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내 담배를 아버지에게 숨겨주던 모습, 글을 몰라도 수학책 값을 챙겨주던 손, 병이 든 뒤에도 같은 집 안에 계셨던 시간이었다. 살아 계실 때는 너무 익숙해서 제대로 보지 않았던 장면들이 담배를 끊고 나니 하나씩 돌아왔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나는 담배를 끊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가 내린 솔직한 판단이다. 어머니를 잃은 일이 금연의 대가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죽음 앞에서도 예전과 똑같이 살고 싶지는 않았다. 금연은 내가 바꿀 수 없었던 마지막 열흘 대신, 그 이후의 내 생활에서 바꿀 수 있었던 한 가지였다.

    담배는 멀어졌지만 미안함은 아직 남아 있다

    첫 3개월을 넘기자 담배 생각은 조금씩 줄었다. 담배와 늘 붙어 다니던 술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지금까지 다시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다. 오래 피웠던 기간만 보면 다시 손이 갈 법도 한데, 어머니 앞에서 한 맹세를 떠올리면 한 개비도 가볍게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담배를 끊은 것으로 어머니에게 다 갚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지막 열흘 동안 더 관심을 갖지 못한 일, 임종을 지키지 못한 일은 금연으로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잘한 일보다 못한 일이 먼저 떠오른다. 특히 병든 모습이 싫어 집에 늦게 들어갔던 내 마음은 변명하기 어렵다.

    다만 나는 그날 이후 적어도 하나의 약속은 지켰다. 30년 가까이 피운 담배를 다시 입에 대지 않았고, 술자리도 예전처럼 붙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의지가 세다고 말하면 나는 속으로 어머니를 생각한다. 내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라, 너무 늦게 철든 아들이 다시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70살이 되어 돌아보니 부모님께 잘했다는 기억보다 하지 못한 일이 더 오래 남는다. 살아 계실 때 한 번 더 들여다보고, 한 번 더 말을 걸고, 잠깐이라도 곁에 앉았어야 했다. 나는 그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오늘도 담배를 피우지 않으며 앞으로도 다시 피울 생각이 없다. 이것이 부산추모공원에서 어머니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내 방식이다.

    ※ 당시 진료 상황과 기간, 흡연량은 오래전 일을 떠올린 개인의 기억을 기준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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