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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뒤 아내와 함께 시골로 들어갔습니다. 아내의 오빠가 가지고 있던 집과 땅을 별다른 준비 없이 사게 된 것입니다.
25평 정도 되는 전원주택 한 채와 큰 창고 한 채가 있었습니다. 야산은 약 4만 평이었고 주변 전답도 2천 평 정도 됐습니다. 매매가격은 약 4억 5천만 원이었습니다.
당시는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 가격이면 적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나도 공인중개사 자격이 있었고 잠시 중개 업무를 해봤으며, 아들도 투잡으로 부동산 중개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2~3년 정도 보유한 뒤 다시 팔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동산을 조금 안다는 마음이 오히려 내 판단을 낙관적으로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4만 평 야산보다 무거웠던 3억 5천만 원 대출
집과 땅을 살 때 지역농협에서 약 3억 5천만 원을 담보대출로 받았습니다. 구입 후 1년 정도는 이자가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당시 2.8% 정도였던 금리가 이후 약 5%까지 올랐습니다. 이자만 오른 것이 아니라 원금도 함께 갚아야 했습니다.
국민연금을 받으면 생활비보다 은행 원금과 이자를 내는 일이 앞섰습니다. 돈이 모자랄 때에는 도시에 사는 아들이 조금씩 보태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부동산 사무실도 경기가 나빠 수입이 많이 줄었습니다. 우리도 제때 돈을 맞추지 못해 가끔 은행 연체가 생겼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본전이라도 받고 다시 팔자.”
읍내 주변 부동산에 집과 땅을 내놓았습니다. 가격을 더 받아보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산 금액만이라도 받고 빠져나오고 싶었습니다.
매물로 내놓고 약 10개월을 기다렸지만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살 때는 2~3년 뒤 매매를 생각했지만, 막상 팔려고 하니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목욕탕 카운터로, 나는 풀밭으로 갔다
집이 팔릴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했습니다. 아내는 읍내 목욕탕 카운터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틈틈이 농사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손댄 것은 간단한 채소였습니다. 채소를 심는 일보다 더 힘든 것은 땅을 고르고 계속 자라는 풀을 베는 일이었습니다.
도시에서 보던 시골집은 넓고 조용해 보였습니다. 직접 살아보니 넓은 땅은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계속 손을 대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풀베기와 땅고르기를 하면서 장비가 없으면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수할 때에는 중장비를 배울 계획이 전혀 없었지만, 집이 팔리지 않으니 내가 땅에서 버틸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경남 김해에 있는 중장비 학원을 알아봤습니다. 그때 내 나이는 66세였습니다.
지게차 시험의 2초 부족이 30초 여유로 바뀌었다
학원 한 반에는 수강생이 약 30명 있었습니다. 대부분 20대부터 50대였고,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사람은 나 혼자였습니다.
나도 젊어 보이고 싶어서 청바지를 입고 다녔습니다. 젊은 수강생들과 젊은 선생님 사이에 섞여 수업을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66세에 시작한 겁 없는 도전이었습니다.
한 달간 수업을 받은 뒤 굴삭기 실기시험에 한 번 만에 합격했습니다. 굴삭기가 한 번에 되니 지게차도 곧 붙을 줄 알았습니다.
일주일 뒤 치른 지게차 실기시험에서는 떨어졌습니다. 다시 일주일 뒤 두 번째 시험에 도전했지만 이번에는 통과 시간에서 단 2초가 부족했습니다.
전진할 때 가속페달을 밟아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잘못 밟았던 것 같습니다. 겨우 2초 때문에 다시 떨어졌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했습니다.
지인에게 부탁해 밤늦게까지 지게차를 다시 연습했습니다. 동작 순서를 되풀이하고 시간을 줄이는 연습을 한 뒤, 또 일주일 후 세 번째 시험장에 들어갔습니다.
세 번째 시험에서는 제한시간보다 무려 30초를 남기고 합격했습니다. 지난 시험의 2초 부족이 이번에는 30초의 여유로 바뀌었습니다.
지게차 합격이 대출을 없애주거나 집을 팔아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집이 팔리지 않는 동안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더 만들어줬습니다.
내 시골생활의 기억에는 예쁜 전원주택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3억 5천만 원 대출, 국민연금으로 갚던 원금과 이자, 10개월 동안 조용했던 부동산 연락, 목욕탕 카운터로 출근한 아내, 청바지를 입고 학원에 간 66세의 내가 함께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시골생활이 어떠냐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골생활, 아무나 못하지요. 나는 팔리지 않는 집에서 버티려고 굴삭기부터 배웠습니다.”
※ 대출 금리와 당시 시점은 개인의 기억을 기준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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