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0. 10. 14:20ㆍ가족·돌봄
제삿날 저녁, 작은형님이 제사상을 발로 찼습니다. 과일상이 그대로 엎어졌습니다.
그날 나는 제사상을 평소와 다르게 차렸습니다. 전도 부치지 않고, 생선도 나물도 없이 과일만 올렸습니다. 지방도 한자로 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한글로 적어 세워 놓았습니다.
형님들에게는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부의 생각대로 한 것입니다.
작년을 마지막으로 부모님 제사를 그만 모시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결정하기까지 마음이 편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그날 저녁에 있었던 일이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 손을 잡고 제사에 다니던 아이가 제사를 모시게 됐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약 15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부모님 제사는 내가 모셨습니다.
우리 집안에는 형님 두 분과 여형제 넷이 있습니다. 형님들은 연세가 일흔여덟, 여든이시고, 나와는 다른 지방에 살고 계십니다. 형님들께는 딸들만 있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모시고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사도 내가 지내게 됐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손을 잡고 형님과 함께 큰댁 제사에 참석했습니다. 어릴 때는 제사에 가면 용돈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중고등학교 때도 큰댁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왜 제사에 가야 하는지 물어본 적은 없습니다. 가라니까 갔고, 가면 절을 했습니다. 절을 마치고 나면 밥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아이가 세월이 흘러 제사상을 차리는 사람이 됐습니다. 제사에 참석하던 입장에서 제사를 준비하는 입장으로 바뀐 것입니다.
형님들은 다른 날은 몰라도 제삿날만큼은 거의 빠지지 않고 오셨습니다. 그 점은 지금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과일만 올린 제사상, 작은형님은 왜 화를 내셨을까
제사를 모시는 세월이 길어지면서 내 생각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부모님 제사를 13~14년쯤 모시다 보니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왜 제사는 꼭 이렇게 지내야 할까?’
전을 부치고, 생선을 굽고, 나물을 무치고, 과일을 괴는 일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갑니다. 해마다 같은 준비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형식에 얽매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많은 음식을 누가 먹는 것일까. 이 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집사람이 말을 꺼냈습니다.
“이제부터 제사상에는 과일만 올리면 어떨까요?”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제사상을 간소하게 차리기로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형님들에게 미리 말씀드리고 의논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님을 모시는 방식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지방도 바꿨습니다. ‘현고학생부군신위’, ‘현비유인이씨신위’ 같은 한자 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한글로 적어 올렸습니다. 어려운 한자 표현보다 부모님의 이름을 직접 적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날 형님들이 오셨습니다.
큰형님은 우리의 뜻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작은형님은 크게 화를 내셨습니다. 그러더니 제사상을 발로 차 과일상을 엎어 버렸습니다.
옆에 있던 아들과 조카들, 여형제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자리를 피했습니다. 제삿날 저녁, 집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습니다.
제사상을 간소하게 차리는 문제로 이렇게까지 큰 다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형님은 집을 나갔고, 내 마음은 무거워졌습니다
작은형님은 큰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제사는 내가 모실 테니 그리 알아라.”
그러고는 집을 나가 버리셨습니다.
나는 우리 생각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시대에 맞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사를 지내는 방식도 세월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조금 간편하게 지내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작은형님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전통적인 제사 문화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는 제사를 제대로 모셔야 한다며 뜻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큰형님이 말리셔서 그날 일은 일단락됐습니다.
그런데 일이 끝났다고 해서 내 마음까지 편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마음 한구석이 어수선합니다. 부모님 산소를 전보다 자주 찾아가게 되고, 밤이면 부모님 생각이 나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내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해 한 일이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지 모르겠습니다.
제사를 어떻게 지내느냐는 문제와 부모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는 문제는 서로 다른 것일 텐데, 막상 내 일이 되고 보니 마음처럼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 생각은 더 자주 납니다.
아들은 할아버지가 학생 때 돌아가신 줄 알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나는 하나뿐인 아들과 제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내가 죽으면 네가 제사를 지내야 할 텐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들은 뜻밖에도 아버지처럼 제사를 지내지는 않겠다고 했습니다. 조금은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작은큰아버지의 말씀처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1년에 한 번 제사를 지내겠다고 했습니다. ‘현고학생부군’ 같은 말도 공부해서 그 뜻을 알아보고 제사를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조금 감동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은 어릴 때 겪었던 일을 들려줬습니다.
제사상에 놓인 지방에 적힌 ‘현고학생부군’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학생 때 돌아가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었습니다.
그런데 웃고 나니 마음이 묘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어릴 때 아버지 손을 잡고 제사에 다니면서 그 글자가 무슨 뜻인지 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들은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래도 행복하신 거예요. 아들이 있으니까 제사도 지내 드릴 수 있잖아요. 나는 외동딸이라서 아버지를 기억하고 제사를 지낼지는 몰라도, 나와 성이 같은 남자가 없으니 대가 끊기는 거잖아요.”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나는 제사상을 어떻게 차릴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는데, 아들은 자기 나름대로 부모를 기억하는 일과 집안의 대를 잇는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에 대한 생각은 서로 달랐지만, 부모님을 기억하는 마음만큼은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사는 그만두어도 부모님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얼마 후 나는 작은형님께 연락드렸습니다. 형님과 미리 의논하지 않고 제사 방식을 바꾼 점에 대해서는 잘못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부모님 제사는 앞으로도 마음으로 잘 모시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작은형님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형님에게는 딸만 둘이 있습니다. 어쩌면 제사는 단순히 음식을 차리고 절을 하는 일이 아니라, 부모님을 기억하고 집안의 전통을 이어 가는 의미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사상을 발로 차고 엎어 버린 일이 옳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서로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그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마음도 조금씩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더 잘해 드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여전히 남습니다.
부모님은 평범하게 살아가시다 돌아가신 분들이었습니다. 제사상에 어떤 음식을 올렸는지, 지방을 한자로 썼는지 한글로 썼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님을 기억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이제 예전처럼 제사상을 차리지 않더라도 부모님을 잊고 싶지는 않습니다.
과일 몇 개를 올리든, 산소를 찾아가든, 마음속으로 부모님 이름을 불러 보든, 그리워하는 마음까지 없앨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 손을 잡고 제사에 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때는 제사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이제는 내가 나이가 들어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문득 부모님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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