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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언양 시장에서 나는 깜짝 놀라 자빠질 뻔했어요. 리어카 위에 있는 과일들과 일회용 비닐봉투 꾸러미, 그 옆에 선 한 사람이 내가 알던 목욕탕 김사장이었어요. 허름한 옷차림에 면도도 안 해서 하얀 턱수염이 수북했습니다. 부산에서 제법 큰 과일상점을 했고 지금은 자식에게 물려주고 한 달에 용돈을 200만원씩 받는다던 그 양반이요. 울산 5일장에서 '어어' 하고 그렇게 만났습니다.
달 목욕, 은퇴 후 9년째 하루 5000원
나이 들수록 단정해야지 싶어서 나는 달 목욕을 다닙니다. 달 목욕이라는 게 별건 아니고, 하루 목욕비가 9000원인데 한 달치를 미리 신청하면 하루 5000원 정도로 계산이 되는 겁니다. 매일 다니는 사람한테는 이게 딱 맞아요. 그래서 은퇴 후 지금까지 이걸 고수해 왔습니다. 은퇴한 지가 9년, 10년쯤 되는지요. 참 세월 빠릅니다.
나는 주로 새벽 목욕을 합니다. 그 시간에는 나와 같은 연령대가 많이 와요. 탕 안에서는 자기가 옛날에 잘나갔다는 이야기, 자식 자랑,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갑니다. 나는 50%만 믿고 맞장구를 쳐 준답니다.
그중에 자칭 목욕탕 이웃사촌이라고 하는 김사장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목소리도 걸걸하고 가끔 음료수도 사서 권하고 해서 나름대로 호감이 갔던 친구였습니다. 자랑도 많았고요. 앞에서 말한 그 과일상점 이야기, 용돈 200만원 이야기가 그때 나온 겁니다. 나는 많이 부러워했어요.
그런데 얼마 동안 목욕탕에 그 양반이 보이질 않아서 약간 궁금했습니다. 그때는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고 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언양시장에서 마주친 김사장
그러던 어느 날 울산 5일장 언양시장에서 마주친 겁니다.
처음에는 김사장이 내 눈을 피하더라고요. 자존심 때문일까요. 그걸 보고 나도 먼저 피하고 싶었어요. 김사장이 무안할까 봐서요. 그런데 당황하는 김사장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가 도리어 미안해져서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잠시 후에 내가 길커피를 뽑아서 먼저 말을 건넸어요. 미안해하지 않게 하려고요. 어, 여전히 건강하시네. 그 한마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김사장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아직 기질이 남아 있어서일까요, 씩씩하게 여느 노점상인들처럼 이야기를 하네요.
5만원을 과일 밑에 넣어준 이유
김사장은 나보다 두세 살 적은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 하는 말이, D사장 행님요 미안합니다, 제가 거짓으로 형님을 대한 것은 정말 죄송하네요, 하면서 쭉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부산 과일상점은 자기 아들이 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과일 물건들을 배달하고 심부름하는 곳이라고 하네요. 자기 말로는 거래처라고 하데요. 그리고 목욕탕에서는 너무 없어 보이면 사람들이 무시할 수 있으니 자연스레 그런 말들이 나왔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D사장님은 왠지 마음이 끌려서 말을 많이 하고 지냈던 것 같다고요.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 격려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김사장이 과일 한 봉지를 나에게 건넸습니다. 나는 5만원짜리 한 장을 과일 밑에 넣어주면서 말했어요. 야 이 사람아, 그래도 그렇지 순진한 나 같은 사람을 속이다니 괘씸하네. 그렇게 타박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그래도 과일을 많이 먹어서 건강하니 보기 좋네. 열심히 사는 자네가 너무 부러워. 자네는 모르지만 세상 다른 저편에서는 자네를 무척 부러워할 거야.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열심히 살자. 그리고 가끔 허심탄회하게 막걸리도 한잔씩 하자. 그렇게 말하고 헤어져 집으로 왔습니다.
막걸리가 달달한 날
차 안에서 많은 생각이 오고 갔습니다. 김사장은 참 용기가 대단하구나. 나는 어떨까. 그 두 가지가 계속 왔다 갔다 했어요. 사실 나도 얼마 전에 친구들 앞에서 뻥을 친 적이 있었거든요.
집 근처 슈퍼에서 막걸리 한 통을 사 들고 집에 왔습니다. 그리고 김사장이 준 과일을 씻어서 그걸로 안주를 삼았어요. 자기가 팔던 과일을 받아 와서 그걸 안주로 놓고 앉아 있으니 김사장 얼굴이 자꾸 떠오르더라고요.
그러면서 나 자신에게 말했죠. 나이 들어도 사람을 만나면 조금은 허풍을 쳐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자. 그날 밤에는 내가 나를 원망했는데, 이날은 김사장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살아 있으니 이런 경험을 하네요. 그래도 행복한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막걸리가 달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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