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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삶

약 세 통을 믹서기에 갈아 화단에 뿌린 날

dobadalife 2026. 8. 18. 15:08

목차


    오늘도 눈을 뜨면 책상 위에 놓인 약병과 작게 포장된 알약들이 먼저 보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내 주변에 늘어난 것 중 하나가 약입니다. 반대로 통장 잔고와 몸의 힘은 자꾸 줄어드는 것 같아 가끔 겁이 납니다.

    책상 위에 놓인 약들

    노인의 아침, 약병이 먼저 인사한다

    병에 들어 있는 것도 있고 하루치씩 작게 포장된 것도 있습니다. 머리맡에도 있고 식탁에도 있고, 하나둘 모이다 보니 집 여기저기에 약이 보입니다.

    늘어나는 것은 주름과 약이고 줄어드는 것은 잔고와 근력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즘 내 모습을 보면 그 말이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50대 말에 대장암 3기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도 했습니다. 그 일을 겪은 뒤부터 병원과 약이 예전처럼 낯설지는 않게 됐습니다.

    그런데 약을 계속 보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도 듭니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약하고 같이 살아야 하나.

    그러던 중 열흘쯤 전 뒷산을 걷다가 내 또래 남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병문안은 갔지만 자기는 병원 갈 일이 없었다는 사람

    뒷동산 체육시설에서 만난 사람인데 자기가 이곳 운동시설 대장이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자기 말로는 70살이 넘도록 큰 감기 한번 안 걸렸고, 술도 잘 마시고, 다른 사람 병문안은 가봤지만 자기가 아파서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은 기억은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솔깃했습니다.

    “도대체 비결이 뭡니까?”

    그 사람이 자기 어릴 때 이야기를 했습니다.

    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아버지가 사슴농장을 했고, 어릴 때 사슴피와 녹용을 먹었으며 지금도 팩으로 나오는 녹용을 먹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이 자기 건강에 대해 내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녹용을 먹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건강했다는 것을 내가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가 며칠 동안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잔고 55만6000원, 내가 알아본 녹용은 55만원

    결국 집에 와서 아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뒷산에서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녹용 좀 사주면 안 되겠냐고 엄살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 운동이나 열심히 하세요.”

    사람마다 몸도 다른데 남이 좋다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무턱대고 먹으려고 하지 말라면서 차라리 자기가 소고기 한 근을 사주겠다고 합니다.

    전화를 탁 끊는데 나는 어린 노인이 된 것처럼 괘씸하기도 하고 조금 서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휴대폰을 열어 예금 잔고부터 확인했습니다.

    통장 잔고 556,000원.
    내가 알아본 녹용 가격 550,000원.

    사고 나면 6,000원이 남는 계산이었습니다.

    연금이 들어오는 날은 25일인데 아직 7일이나 남았습니다.

    녹용 한번 먹어보겠다고 통장에 6,000원 남겨놓고 일주일을 살 수는 없지 않나 싶다가도, 또 건강에 좋다니 한번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건강 이야기를 듣고 내 통장 잔고까지 들여다본 내가 조금 우습기도 합니다.

    다시 뒷산에 갔는데 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한 4일 뒤 다시 체육공원에 갔습니다.

    녹용은 어디서 구하는지 조금 더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다음 날 다시 가도 없었습니다.

    주변에 물어보니 며칠 전 그 사람이 병원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병원에 간 일이 녹용과 관계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정신이 조금 들었습니다.

    며칠 전까지 나는 그 사람이 건강하다는 말만 듣고 그 사람이 먹었다는 것을 나도 사려고 통장 잔고까지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남의 건강 경험 하나를 내 몸의 정답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겁니다.

    그날 나는 녹용을 사려던 생각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평소 다니던 병원에 들러 이전 검진 뒤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들에게 전화해 녹용은 안 사기로 했으니 약속했던 고기나 사달라고 했습니다.

    약 세 통을 갈아 화단에 뿌려버렸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어제와 똑같이 약들이 눈앞에 떡 버티고 있었습니다.

    영양제 하나를 먹다가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아, 이게 내 일상인가. 내가 약의 노예가 된 건가.”

    그 생각에 집 안 여기저기에 있던 약을 전부 꺼내봤습니다.

    5년 전부터 있던 것, 3년 전부터 있던 것,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것, 외국어가 적힌 것, 포장도 뜯지 않은 것까지 나왔습니다.

    비타민과 각종 영양제도 있었고, 먹다가 남겨둔 약도 있었고, 기한이 지난 것도 많았습니다.

    왜 그때그때 정리하지 않고 이렇게 모아두고 살았나 싶었습니다.

    현재 의사의 처방에 따라 먹고 있는 약은 건드리지 않고 따로 옆에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기한이 지났거나 복용이 끝난 뒤 집에 남아 있던 약들을 모았습니다.

    그때 내가 엉뚱한 짓을 했습니다.

    약 포장을 뜯고 모아 믹서기에 갈았습니다.

    한 통, 두 통.

    세 통이나 갈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담아 아파트 화단에 확 뿌려버렸습니다.

    “아픔이여 안녕.”

    그때는 정말 속이 후련했습니다.

    약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동안 아팠던 시간까지 한꺼번에 버린 것 같은 기분이 잠깐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약은 그렇게 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화단에 뿌린 건 내가 잘못했다

    이 부분은 내 행동을 따라 하면 안 됩니다.

    부산광역시는 폐의약품 수거함 위치와 참여약국 현황을 안내하고 있고, 약 종류에 따라 적정한 배출 방법도 따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부산광역시 폐의약품 적정배출 안내

    알약은 포장지를 제거한 뒤 내용물만 모아서 배출하고, 가루약은 포장지를 뜯지 않고 그대로 배출합니다. 물약과 시럽은 새지 않도록 밀봉하고, 안약과 연고류는 겉 종이상자를 분리한 뒤 용기째 배출하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약 세 통을 믹서기에 갈아 화단에 뿌렸습니다.

    그날은 속이 후련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약을 그렇게 버린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날 오래된 약을 정리했다고 해서 현재 의사가 처방해준 약까지 내 마음대로 끊은 것은 아닙니다.

    내일 아침에도 눈을 뜨면 약병들이 또 먼저 보일 겁니다.

    이제는 그 약들을 보면서 예전처럼 무조건 없애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기보다, 먹어야 할 약과 버려야 할 약부터 제대로 구분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그날 내가 버려야 했던 것은 약 자체가 아니라, 남의 건강 자랑 한마디에 내 몸의 답까지 찾으려 했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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