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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돌봄

아버지 치매 15년·어머니 5년,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아내였다

dobadalife 2026. 8. 6. 20:13

“아버지 치매 15년, 어머니 5년.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집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치매로 약 15년을 지내셨고 어머니도 약 5년을 지내셨다. 그때 나는 회사에 다녔고 월급은 200만원 정도였다. 부모님을 모시고 생활비를 맞추며 살았지만, 집 안에서 실제로 가장 많이 움직인 사람은 집사람이었다.

나는 회사에 다닌다는 이유로 부모님 돌보는 일을 집사람에게 많이 넘겼다. 그러면서도 집사람에게는 늘 비슷한 말을 했다.

“조금만 고생하자. 나중에는 내가 다 해줄게.”

그때는 나도 진심이었다. 그런데 70살이 되어 생각해보면 그 말 중에 내가 지킨 것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치매 부모님을 모실 때 가장 많이 움직인 사람

보고싶은 나의 부모님

아버지가 치매를 앓은 기간은 약 15년이었다. 어머니도 약 5년을 지내셨다. 말이 잘 통하지 않고 같은 일을 되풀이하던 때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부모님이 오래 사시는 것이 힘들다고 느낀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시고 나니 이상하게 힘들었다는 기억보다 집 안에 부모님이 계셨다는 사실이 더 크게 남았다. 다시 모실 수 있다면 내가 잘할 수 있다고 큰소리칠 자신은 없다. 그래도 한 번만 더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은 한다.

부모님을 모시는 동안 집사람은 집안일만 한 것도 아니었다. 돈이 부족하니 틈틈이 바깥일도 했다. 부모님을 살피고 집안일을 하고 다시 돈을 벌러 나갔다.

나는 회사에 다닌다는 이유로 그 무게를 많이 넘겼다. 그때는 내가 돈을 벌어오는 것도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면 그것만으로 내 몫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다.

월급 200만원인데 밖에서는 내가 먼저 술값을 냈다

당시 내 월급은 200만원 정도였다. 그 돈으로 생활하고 부모님까지 모시려니 넉넉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친구나 회사 동료들과 술을 마시면 남보다 먼저 술값을 내곤 했다. 돈이 많아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밖에서는 부족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술자리에서는 내가 계산하고 집에 돌아오면 그만큼 생활비는 줄어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밖에서는 좋은 사람 소리를 듣고 싶어 하면서 가정에는 불합격인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회사에 다니고 월급을 가져다주니 나도 내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사람 입장에서 보면 월급은 넉넉하지 않고, 부모님은 돌봐야 하고, 남편은 술자리에서 먼저 돈을 내고 있었던 셈이다.

“조금만 고생하면 나중에 다 해줄게”

집사람에게 내가 자주 했던 말이 있다.

“조금만 고생하면 나중에 다 해줄게.”

그 말을 할 때마다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형편이 나아질 것이고, 그때가 되면 집사람이 고생한 만큼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마음만큼 되지 않았다. 내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회사 월급도 뻔했다. 약속은 크게 해놓고 실제로 해준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다.

부모님을 직접 돌보고 일까지 다닌 집사람의 시간을 이제 와서 돈으로 갚을 수도 없다.

“너무 깨끗하게만 살아서 누가 알아주나”

생활이 빠듯할 때 집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진심이었는지 답답해서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남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잘 벌어 오는데 너무 깨끗하게만 사는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사고도 좀 치고 변칙도 쓰고, 높은 사람에게 잘 보여서라도 가족을 편하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의 말이었다.

그 말을 하고 나면 집사람도 금방 후회하곤 했다. 정말로 내가 나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오라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생활비를 맞추고 본인까지 일을 해야 하니 답답해서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때 잠깐은 생각했다. 나도 좀 얍삽하게 살아볼까.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고 변칙적으로 살면 지금보다 돈을 더 벌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그렇게 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것을 두고 내가 바르게 살았다고 자랑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원칙을 지켰다고 해서 집사람이 덜 힘들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야 다시 내 일을 붙들었다

외아들이 대학을 마치고 취직하고 결혼했고, 나도 회사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때는 부모님도 두 분 다 돌아가신 뒤였다.

회사까지 그만두고 나니 이제 정말 다 끝난 사람처럼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새로 붙든 것이 공인중개사 공부였다. 세 번을 도전했고 대상포진으로 병원에 5일 입원하기도 했다.

그 3년의 시험 과정은 이 글에서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고 한다. 공부하다 병원에 입원하고 중개보조원으로 20일 일한 뒤 다시 책을 폈던 이야기는 공인중개사 공부하다 대상포진으로 5일 입원했다에 따로 적었습니다.

70살이 되어 생각나는 사람은 집사람이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힘들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돌아가신 뒤에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시절을 다시 생각하면 부모님 다음으로 집사람이 떠오른다.

나는 회사에 간다고 집을 나섰지만 집사람은 부모님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고, 돈이 부족하면 다시 일을 하러 나갔다. 그 와중에 나는 밖에서 체면을 세운다고 술값을 먼저 내기도 했다.

이제 와서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 마음은 조금 편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편해지려고 그렇게 정리하고 싶지는 않다.

아버지는 치매로 15년, 어머니는 5년을 지내셨다.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살면서 가장 많이 버틴 사람은 내가 아니라 집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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