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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치매 15년, 어머니 5년 모심. 그래도 살아계셨을 때가 그립다.”
그 세월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버티고, 서로 모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일은 나아질 것이라 말하며 살았던 시간이었다. 회사생활을 마친 뒤에도 다 끝난 사람처럼 지내고 싶지 않아 공인중개사 시험을 붙들었다. 아들은 한 번에 붙었지만 나는 세 번을 치렀고, 떨어진 줄 알았던 마지막 시험은 문제 하나로 뒤집혔다.
아버지 치매 15년·어머니 5년, 월급 200만원으로 버틴 시간
아버지는 치매로 15년 정도 사셨고 어머니는 5년 정도 사셨다. 두 분을 모시는 동안 힘든 일이 많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살아계셨을 때가 그립다. 치매를 앓기 전의 부모님만 그리운 것도 아니다. 말이 잘 통하지 않고 같은 일을 되풀이하던 그때의 모습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으니 그립다.
사실 몸이 제일 힘들었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집사람이었다. 집사람은 치매 부모를 공양하면서도 틈틈이 일하러 다녔다. 집안일도 해야 했고 부모님도 살펴야 했고, 돈이 부족하니 바깥일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회사에 다닌다는 이유로 그 무게를 집사람에게 많이 넘겼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집사람에게 자주 한 말은 조금만 고생하자는 말이었다. 나중에는 뭐든지 다 해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할 때는 나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형편이 나아지고 집사람이 고생한 만큼 편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거짓 위로가 되었다. 내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회사 월급은 뻔했다. 내가 많이 벌어와야 집사람에게 무엇이라도 해줄 수 있는데 현실에서는 해줄 것이 별로 없었다. 약속은 크게 해놓고 그대로 해주지 못한 내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당시 내 월급은 200만원 정도였다. 그 돈으로 생활하고 부모님을 모시려니 항상 부족했다. 돈이 많이 나간 곳을 생각하면 대부분은 가사에 들어갔지만, 내 개인적인 사회생활에 쓴 돈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돈이 부족하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친구나 회사 동료들과 술을 마시면 남보다 먼저 술값을 내곤 했다. 프라이드와 자존심은 강해서 밖에서는 부족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그 술값만큼 생활비가 줄어드는 것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나는 밖에서는 좋은 사람 소리를 듣고 싶어 하면서 가정에는 불합격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시간에는 부모님이 오래 사시는 것이 힘들다고 느낀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시고 나니 힘들었다는 기억보다 집 안에 부모님이 계셨다는 사실이 더 크게 남았다. 다시 모실 수 있다면 잘할 수 있다고 큰소리칠 수는 없다. 그래도 한 번만 더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은 한다.
가정에는 불합격, 그래도 순리대로 살았다
집사람도 내가 어디에 돈을 쓰는지 알고 있었다. 월급이 넉넉하지 않은데 남편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술자리에서는 먼저 계산했다. 집사람 눈에는 내가 무능하고 능력이 부족하며 앞으로의 비전도 별로 없는 남편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집사람은 부모님을 모시는 중에도 알바 같은 일을 하게 되었다.
집사람이 한 말 중에 아직 기억나는 것이 있다. 진심이었는지 우스갯소리였는지는 모르겠다. 남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잘 벌어 오는데, 너무 깨끗하게 사는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사고도 좀 치고 변칙도 쓰고, 높은 사람을 찾아가 아부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쉽게 이야기했다.
그 말을 하고 나면 집사람도 금방 후회하곤 했다. 정말로 내가 사고를 치거나 나쁜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오라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생활비를 맞추며 몸까지 힘드니 답답해서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 말을 들을 때 집사람을 탓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잠깐은 얍삽하게 살아볼까 생각한 적이 있다. 조금 변칙적으로 살고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면 지금보다 돈을 더 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남들은 그렇게라도 자기 가족을 편하게 해주는 것 같은데, 나는 원칙만 이야기하며 능력 없는 사람으로 남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결국에는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고 내 자신을 타일렀다. 내가 대단히 바르고 훌륭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한 번 쉽게 가기 시작하면 그다음에는 어디까지 가야 할지 나도 자신이 없었다. 돈을 더 벌지 못하는 답답함은 있었지만, 적어도 집에 들어갈 때 무엇을 숨기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도 집사람에게 했던 말을 생각한다. 조금만 고생하면 나중에 다 해주겠다는 말이다. 그 약속을 다 지켰다고 할 수는 없다. 부모님을 직접 돌보고 일까지 다닌 집사람의 시간을 돈으로 갚을 수도 없다. 그래서 내 인생을 순리대로 잘 살았다는 말만으로 스스로에게 합격을 주기도 어렵다.
한 문제를 끝까지 확인한 아들, 나는 32회 합격생이 되었다
하나뿐인 외아들이 대학을 마치고 취직하고 결혼했고, 나도 회사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때는 부모님도 두 분 다 돌아가신 뒤였다. 아직 내게 의지와 열정이 남아 있을 때 무엇인가 새로 해보고 싶었다. 그 무렵 공인중개사 시험이 한창 열풍이었고 나도 한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아들과 같이 공부를 시작했다. 아들은 한 번에 합격했다. 나는 첫 번째 시험에서 1차는 붙었지만 2차에서 떨어졌다. 처음부터 쉬운 시험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공부를 시작한 아들이 바로 붙고 나는 떨어지니 마음이 복잡했다.
그다음 해에는 2차 시험만 치면 되었다. 한 번 떨어져봤으니 두 번째에는 되겠지 싶었지만 또 떨어지고 말았다. 시간은 많았는데 나이가 있으니 공부한 것이 머릿속에 들어왔다가도 금방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한 번 떨어졌을 때와 두 번 떨어졌을 때의 기분은 달랐다. 내가 이 나이에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싶었다.
그래도 책을 놓지는 않았다. 세 번째 시험에는 다시 1차와 2차를 같이 준비해야 했다. 하루 종일 동영상 강의를 들었고 하루 종일 모의고사를 풀었다. 틀린 문제를 다시 보고 돌아서면 또 헷갈렸다. 공부할 시간은 충분했지만 긴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일 자체가 쉽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힘들기만 한 시간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시킨 일도 아니고 누가 억지로 하라고 한 공부도 아니었다. 내 선택으로 강의를 듣고 문제를 풀었다. 이 나이에 무엇을 하나 싶은 날도 있었지만, 아직 내가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결과와 별개로 꽤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세 번째 시험을 치르고 가채점을 했을 때는 한 문제 차이로 떨어진 것으로 나왔다. 또 떨어졌다는 생각에 정말 허탈했다. 두 번 실패하고 다시 1차와 2차를 모두 공부했는데 한 문제 때문에 안 된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들인 시간이 한꺼번에 무거워졌다.
그런데 아들이 중개사법에서 이의제기된 문제 하나를 찾아냈다. 그 문제가 응시자 모두 정답으로 처리되면 내 점수가 합격선에 들어간다고 했다. 아들은 그 뒤로도 그 문제가 정말 모두 정답 처리되는지 계속 확인했다. 다시 점수를 계산하면 합격이었지만, 최종 정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완전히 합격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최종 정답지가 배포되었을 때 아들이 확인하던 문제는 모두 정답으로 처리되었다. 그제야 내 점수가 합격선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떨어진 줄 알았던 시험이 한 문제로 뒤집혔다. 합격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확인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정말 이보다 행복할 수 없었다.
공인중개사 합격증을 다시 꺼내 확인해보니 나는 제32회 합격생이었다. 내가 인생에서 쳐본 시험 중에 가장 공을 많이 들였고 가장 힘들었던 시험이었다. 아들은 한 번에 붙었지만 나는 세 번 걸렸다. 그래서 내 합격은 내게 더 크게 남았다.
합격을 확인하고 나서는 그동안 보던 어마어마한 책과 모의고사 시험지, 내가 공부하며 쓴 종이들을 모두 한 번에 버렸다. 그 많은 것을 버렸는데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세 번에 걸친 내 시험은 그제야 완전히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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