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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내가 결혼정보사에 100만원 주고 자식도 없고 홀로된 40대 초반 여성을 구해달라고 했다.”
얼마 전 중학교 동창 영섭이한테 전화가 왔어요. 여기서는 영섭이라고 하겠습니다.
좋은 소식이 오면 꼭 이야기해주겠다고 하는데, 전화를 끊고 나니 지금은 내가 더 궁금해졌습니다.
이 친구를 안 지가 벌써 5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중학교 때 비싼 맞춤 교복을 입던 부잣집 친구가 70살이 넘어 새 장가를 들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듣고 나니 돈 많은 친구가 부럽다는 생각보다 다른 마음이 들었어요.
중학교 때 볼펜을 주던 부잣집 친구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쯤에는 어른들 입에서 빨갱이니 친일파니 하는 말을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영섭이가 떠올랐어요.
영섭이는 중학교 때부터 부잣집 아이였습니다. 교복도 제일모직인가 하는 비싼 맞춤옷을 입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나한테 볼펜도 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돈 자랑을 하는 아이는 아니었어요. 친구도 별로 없었고 말도 별로 없었습니다. 집안 이야기도 잘 하지 않았어요.
짝이었던 나와는 제법 친하게 지냈는데 가끔 보면 좀 우울해 보인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가면서 소식도 뛰엄뛰엄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50대 중반쯤 됐을 때 중학교 동창모임에서 다시 만났어요. 퇴직하고 나서는 가끔 연락도 하고 만나기도 하는 사이가 됐습니다.
거제도 낚시를 갔다가 처음 들은 집안 이야기
얼마 전에는 둘이 거제도로 1박 2일 낚시 겸 휴양을 갔습니다.
낚시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같이 술을 마시는데 평소 말이 별로 없던 영섭이가 그날은 몹시 흥분한 목소리로 자기 집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 아래 일제강점기 집안 이야기는 그날 친구가 나에게 직접 들려준 내용입니다. 내가 당시 기록이나 재산 형성 과정을 따로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
영섭이 말로는 자기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꽤 부자였다고 합니다.
일본 사람이 경영하던 방직공장에 취직해서 나중에는 사장 비서까지 했다고 했어요. 덩치도 좋고 부산 바닥에서는 함부로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일본인 사장과 일본 순사들과 술도 마시며 가까이 지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들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런 관계 덕분에 주변 논과 밭을 헐값에 살 수 있었던 것으로 자기는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재산을 아들인 영섭이 아버지 앞으로 등기해 놓고 아들을 일본으로 기술 배우러 유학까지 보냈다고 합니다.
해방이 되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세상이 어수선할 때도 아버지가 재산을 잘 지켰고, 나중에는 동네 유지로 살았다고 했어요.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욕심도 많고 나쁜 사람이야”
술자리에서 영섭이가 그러더라고요.
그러더니 또 이런 말을 합니다.
“그래도 내가 우리 아버지 덕분에 남부럽지 않게 살지 않았나, 친구야.”
나는 위로한다고 말했어요.
“야, 그 시절 일이 내가 뭐 얼마나 알겠노. 너 혼자 너무 마음에 담고 살지는 마라.”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이 친구 마음이 참 고운 친구구나 싶었습니다.
내가 만일 영섭이 같은 입장이었다면 저렇게까지 생각했을까 싶었어요.
아마 나는 속으로 ‘참, 웃기고 있네. 시대가 시절이 그런 걸 지금 와서 그런다고 없어지나’ 하면서 혼자 투덜거렸을 것 같습니다.
중학교 때 그렇게 부잣집 아이면서도 집안 자랑을 잘 하지 않던 친구였습니다.
그날 술을 같이 마시면서 나는 이 친구 속에 그런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건물 두 채가 있는데 “인생 참 허망한 거여”
영섭이는 지금도 부자입니다.
시내에 5층짜리 상가 건물이 두 채나 있다고 해요.
그런데 그날 친구 입에서 나온 말은 돈 자랑이 아니었습니다.
“인생 참 허망한 거여.”
아내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들 하나는 마흔이 되도록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영섭이는 자기 뒤로 더 이상 자손을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어요.
꿈속에는 돌아가신 아버지도 한번씩 왔다 갔다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만나서 손자, 손녀 자랑을 하는 것을 들으면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 만나기가 싫어진다고 했어요.
그 말이 나는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건물 두 채를 가진 친구를 두고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나는 행복하구나.
그날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40대 초반 여자하고 새로 장가 한번 갈까?”
한참 이야기를 하던 영섭이가 갑자기 나한테 말했어요.
“친구야, 내가 40대 초반 여자하고 새로 장가 한번 갈까?”
처음에는 술김에 그냥 하는 말인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진지했어요.
영섭이는 재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건물 한 채를 줄 생각까지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랬어요.
“그거는 니 마음이고 니가 알아서 해라.”
그리고 내 생각도 말해줬습니다.
대를 이을 자손도 중요하겠지만 그것까지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느냐. 이제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낼지도 한번 생각해보는 게 내 생각이라고요.
그러다가 내가 물었어요.
“야, 니 나이가 70인데 몸이 받쳐주겠나?”
그러자 영섭이는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는 듯 아주 자신 있게 이야기하더라고요.
나는 웃으면서 말했어요.
“야, 친구야. 아직 살아 있네.”
부러워하는 척 웃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연민의 정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새벽이 다 오도록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영섭이도 그날 술이 많이 취했던 것 같습니다.
술자리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거제도에서 한 이야기가 그냥 술자리 이야기로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영섭이한테 연락이 왔어요.
“친구야, 내가 말이야. 결혼정보사에 100만원 주고 자식도 없고 홀로된 40대 초반 여성 구해달라고 했다.”
진짜 행동으로 옮긴 겁니다.
그러면서 좋은 소식이 오면 꼭 이야기해주겠다고 했어요.
그 전화가 온 지 벌써 일주일 정도 지났습니다.
이제는 영섭이보다 내가 더 궁금합니다.
중학교 때 비싼 맞춤 교복을 입고 나한테 볼펜을 주던 아이가 어느새 70살이 됐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내려온 재산이 있었고 지금도 남부럽지 않게 삽니다.
그런데 일흔이 넘어 그 친구가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건물 한 채를 더 가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뒤로 사람이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그게 뜻대로 될지 안 될지는 나도 모릅니다.
그래서 영섭이한테 이 말은 한번 해주고 싶습니다.
“영섭아, 세상살이가 니 맘대로 잘 안된다.
그래도 꿈을 야무지게 가지고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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