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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삶

3대 영어교육 이야기, 알파벳 몰랐던 할아버지의 이태원 약속

dobadalife 2026. 8. 13. 10:16

목차


    어느 날 손녀 YS한테 전화가 왔어요. 받자마자 그랜드파더 어쩌구저쩌구 하는데 거의 영어로 말합니다. 대충 알아듣고 답을 하니까, 좀 있다가는 이번엔 중국말로 니하오마, 세세, 따거 이러면서 이야기를 해요. 일곱 살입니다. 나는 그저 잘한다 잘한다 하고 넘겼어요. 전화를 끊고 방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아들 학교 다닐 때가 생각나더라고요. 영어책에 한글로 아엠어보이라고 적어놓던 그 아이가, 지금 저 아이 아버지입니다.

    손녀 전화, 영어·중국어 섞어서 말하던 날

    나는 70대고 아들은 40대, 손녀는 7살입니다. 똑똑하다는 손녀, 열심히 살고 있는 아들, 그리고 그냥 허름한 노인인 나. 우리 집 3대를 한 줄로 세우면 이렇습니다.

    얼마 전 손녀와 폰으로 통화를 했어요. 앞에서 말한 그 통화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대충 알아들었다는 것도 말이 좋아 대충이지, 몇 마디 건져서 눈치로 때운 겁니다. 그랜드파더 하는 것만 알아듣고 나머지는 흘려보냈어요. 그런데 아이가 신이 나서 계속 말을 하니까 나도 모르게 그래 잘한다, 우리 YS 잘한다, 이러고 있더라고요. 할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어요.

    중국말이 나올 때는 더 그랬습니다. 니하오마 하는 건 나도 압니다. 세세도 압니다. 그런데 따거는 무슨 소린가 싶었어요. 나중에 물어보니 그건 가족을 부르는 말이라고 하데요. 일곱 살짜리가 두 나라 말을 섞어 쓰는 걸 전화기로 듣고 있으니, 기특하다는 마음보다 어리둥절한 마음이 먼저 왔습니다.

    영어는 다섯 살부터 배웠는가 싶고, 중국말은 최근에 열공한다고 하네요. 아들 말로는 다른 집들도 다 저렇게 교육한답니다. 참으로 세상이 많이 바뀌어가네요. 신기하기도 하고요. 내가 일곱 살 때는 한글도 겨우 뗐을까 말까였을 텐데 말입니다.

    아들 영어교육, '아엠어보이'와 학원 하루

    사실 나는 아들 공부에는 별 관심 없이 살았어요. 그냥 그냥 건강하게 자라고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게 무슨 대단한 교육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었어요. 그냥 내가 바빴고, 공부는 지가 알아서 하는 거라고 여겼던 거죠.

    그런데 우연히 아들이 없을 때 아들 방에 들어갈 일이 있었어요. 책상에 영어책이 펼쳐져 있길래 무심코 들여다봤는데,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뭐 이런 놈이 있나 하고 당황했어요. 이렇게 영어 공부를 못하나 싶고요. 다름이 아니라 영어책 본문 위에, I AM A BOY 글자 위에 아엠어보이, 그 아래 문장 위에는 유아러걸, 이렇게 한글로 또박또박 써놓은 걸 본 겁니다.

    먼 옛날 이야기지만 사실 나도 1960년 후반까지 영어 알파벳도 몰랐지요. 영어는 중학교 가서야 배울 수 있었어요. 가방에 잉크 펜을 가지고 다녔죠. 그때가 아련하네요. 그러니까 나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런 생각이 안 들었어요. 그때는 그때고 아들은 1990년대를 살아가는데, 이러면 안 된다 싶었죠. 나는 말하기를 당장에 영어학원에 등록하자, 너 이러면 고등학교 못 간다라고 다그치며 말했습니다. 평소에 공부 얘기 한마디 안 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그러니 아들도 황당했을 겁니다.

    결과는요, 영어학원 등록하고 하루 만에 도망쳐 왔어요. 그러고는 교과서로 다시 공부하기 시작하네요. 그때 아들이 한 말이 있어요. 학교 공부도 못 따라가는데 학원에서 실력 있는 애들과 같이 공부하는 게 더 힘들다고요. 그리고 덧붙이기를, 집안 사정도 안 좋은데 돈도 아껴야지요라고 말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그 뒤로 다른 공부는 등한시하고 영어만 정말 열심히 공부한 걸로 알고 있어요. 참고로 영어 팝송을 듣고 단어를 찾아보고 하면서 영어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학원에 밀어 넣어서가 아니라, 지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가 궁금해서 사전을 뒤진 겁니다.

    겨우 인문계 갔던 그 아이, 지금 40대 아버지

    영어는 제법 합니다. 영어책에 한글로 아엠어보이라고 적던 아이가 말이에요. 다른 과목은 별로였던 것 같았어요. 겨우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으니까요. 성적표만 놓고 보면 자랑할 게 없는 아이였습니다.

    특히 어학에 관심이 많은 아들이었어요. 지금의 사회는, 세계는 외국어를 할 줄 알아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으니까 자기 딸에게는 열정을 가지고 하는 것 같아요. 지금 손녀 교육은 대부분 일상생활을 영어로 시작한다고 하네요.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인사부터 영어라는 겁니다.

    그 얘기를 듣고 있으면 참 나는 바보스럽고 어리석었다고 자책을 했어요. 모범 가장이 되어서 좀 더 일찍 아들과 같이 공부도 하고 했어야 되는데 하고 후회도 했어요. 그 아이가 방에서 혼자 영어책에 한글을 적고 있을 때, 나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나 싶은 겁니다. 다그치기는 쉬웠고 옆에 앉는 건 안 했어요.

    그래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손녀와 보조를 맞추려면 공부를 더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니어 영어 강의 유튜브 방송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달 손녀에게 줄 용돈으로 영어 교재도 서점에서 사기로 했어요. 손녀 손에 쥐여줄 돈으로 내 책을 사는 셈인데, 이번만은 그게 더 나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손녀에게 말했어요. YS야, 2개월만 기다려라. 그때 우리 외국인 흉내 한번 멋지게 내보자. 서울 이태원 거리를 외국 사람인 양 영어로 이야기하면서 돌아다녀 보자라고요. 이 약속은 손녀 영어 실력을 봐주겠다는 게 아닙니다. 알파벳도 모르던 할아버지가 손녀 옆자리에 한번 앉아보겠다는 겁니다. 아들한테 못 해준 걸 손녀한테 하려고 하니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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