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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삶

50년 친구와 당구 한 판, 영원한 호구가 내가 됐다

dobadalife 2026. 8. 26. 09:48

목차


    술집 8만원, 노래방 12만원.

    그날 친구들과 당구 한 판 치고 내가 계산한 돈이 20만원이었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더 약이 오른 것은 따로 있었어요.

    50년 넘게 우리가 ‘호구’라고 놀리던 친구한테 마지막 한 점을 얻어맞고, 그날부터 내가 호구1이 되어버렸습니다.

    50년이 넘도록 친구 셋의 당구 실력도 별명도 거의 그대로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공 하나가 그 순서를 뒤집어버렸어요.

    꼴찌가 술하고 노래방까지 쏘자

    얼마 전 50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 둘과 당구를 쳤습니다.

    우리 셋은 젊었을 때부터 당구를 같이 치던 친구들입니다.

    한 친구는 우리가 인정하는 300 고수고, 나는 친구들이 부르는 짠돌이 200입니다.

    나머지 한 명은 150.

    우리가 수십 년 동안 ‘영원한 호구’, ‘물당구’라고 놀리던 친구입니다.

    요즘에는 만나도 예전처럼 술을 많이 마시기보다는 간단히 밥을 먹고 헤어지는 날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 호구 친구가 발랄하게 판을 키우자고 합니다.

    “오늘 꼴찌가 술 사고 노래방까지 원코스로 쏘자.”

    나와 300 친구는 바로 콜 했습니다.

    솔직히 나는 별 걱정을 안 했어요.

    300 친구야 내가 이기기 힘들어도, 150 호구 한 명은 밑에 있을 줄 알았으니까요.

    300은 휘파람 불며 끝났고, 호구와 나만 남았다

    게임이 시작되자 300 친구는 역시 달랐습니다.

    여유롭게 치더니 제일 먼저 끝내고 옆에서 휘파람이나 불고 있었어요.

    이제 남은 사람은 나와 호구였습니다.

    둘 다 마지막 1점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한 점을 예전부터 ‘돛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날따라 호구가 이상하게 잘 치더라고요.

    내가 말했습니다.

    “저 호구 절마 어데서 당구 배워왔노. 와 이래 잘 치노.”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차례에 아주 좋은 공이 왔습니다.

    평소에도 제법 자신 있게 치던 공이었어요.

    나는 속으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큐대를 잡고 자신 있게 쳤습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비껴갔습니다.

    아이고.

    실망 대실망이었죠.

    그래도 나는 아직 안심했습니다.

    다음에 놓인 공은 호구가 치기에는 만만한 공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옆에 있던 300 친구도 말합니다.

    “저거는 무리다. 다음 니 차례 오면 잘 쳐라. 2등은 상수 니가 임자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속으로 그래, 한번만 더 오면 끝낸다 하고 있었습니다.

    벗어난 빨간 공이 돌아와 스리쿠션으로 맞았다

    호구가 큐대를 잡았습니다.

    딱 쳤는데 빨간 공이 완전히 벗어나더라고요.

    나는 속으로 됐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벗어나던 공이 돌아오더니 정확하게 스리쿠션으로 마지막 공을 맞혀버렸습니다.

    잠깐 멍했습니다.

    50년 동안 호구라고 놀리던 놈한테 내가 마지막 한 점을 먼저 내준 겁니다.

    실망의 쓰나미가 몰려왔지만 티는 내기 싫었어요.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야 호구야, 오늘부터 니 별명 바꿔라.”

    친구가 뭔데 하고 웃습니다.

    “재수다. 재수 좋은 놈아, 축하한다.”

    말은 축하한다고 하면서 나는 슬쩍 주머니 속 지갑부터 만졌습니다.

    “고맙데이 친구야, 오늘은 니가 호구다”

    당구장을 나와 걸어가는데 그 친구가 뒤에서 실실 쪼개면서 말합니다.

    “고맙데이 친구야. 오늘은 니가 호구다.”

    얼마나 얄밉던지요.

    그날 내가 계산한 게 술집에서 8만원, 노래방에서 12만원 정도였습니다.

    합쳐서 20만원.

    300 친구는 신이 났습니다.

    그날부터 나를 호구1, 원래 150 친구를 호구2라고 부릅니다.

    나는 졸지에 50년 동안 지켜온 내 자리 하나를 빼앗겼습니다.

    50년 전에는 1만원 잃으면 집에서도 당구 생각뿐이었다

    그날 친구들과 웃고 떠들다 보니 젊었을 때 당구 치던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1970년대 후반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나는 한 2~3년 동안 당구에 정말 빠져 살았어요.

    친구들과 밤늦도록 당구장에서 놀았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그 시절 5000원 정도면 친구 셋이 막걸리를 꽤 마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확한 당시 물가자료를 확인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내가 기억하는 금액입니다.

    내기 당구로 내가 가장 많이 잃었던 돈도 1만원 정도로 기억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 나한테는 큰돈이었어요.

    내기에 진 날 집에 돌아와 누우면 얼마나 분했던지 책상이고 천장이고 자꾸 당구대로 겹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눈을 감아도 공이 굴러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시절까지 그립습니다.

    그때 우리한테 당구 점수라는 것도 무슨 공식 자격처럼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구장 주인이 이 정도 치면 몇 점이다 하고 말하기도 하고, 같이 치던 친구들이 정해주기도 했어요.

    그렇게 나는 짠돌이 200이 됐고, 한 친구는 300 고수, 또 한 친구는 150 물당구가 됐습니다.

    그 점수와 별명을 가지고 수십 년을 놀렸습니다.

    그러다가 모두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먹고살기 바빠지면서 당구도 자연스럽게 잊고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하나둘 은퇴하고 나니 다시 큐대를 잡게 되더라고요.

    실력은 옛날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옛날 친구 셋이 다시 당구대 앞에 서면 말투부터 그 시절로 돌아갑니다.

    50년 동안 달라진 것과 그대로인 것

    그때는 1만원을 잃고 집에 와서도 당구 생각뿐이었고, 이번에는 술집과 노래방 계산으로 20만원을 썼습니다. 돈의 크기도 세월도 달라졌지만, 한 공 놓치고 친구한테 약이 오르는 마음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PBA를 보는데 또 그 호구 얼굴이 생각났다

    그날 늦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텔레비전을 켜니 PBA 당구 방송이 나왔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김가영 선수 경기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로선수들 공을 보고 있는데도 자꾸 낮에 놓친 내 마지막 공이 생각나는 겁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빗나간 그 공.

    그리고 뒤에서 실실 웃으면서 “오늘은 니가 호구다” 하던 친구 얼굴.

    참 분하더라고요.

    그래도 생각해보면 20대에 같이 큐대를 잡던 친구들이 70살이 다 되어서도 서로 호구니 고수니 하면서 놀릴 수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50년 전에 당구 때문에 열 받던 놈들이 아직도 똑같이 당구 때문에 열을 받고 있으니까요.

    그날은 텔레비전을 보다가 속으로 한마디 하고 잠들었습니다.

    “담에는 복수해야지.”

    내일 당장 당구장에 한번 가볼 생각입니다.

    연습 좀 야무지게 하고 다시 한 판 벌여야지요.

    호구1이라는 별명을 50년 동안 달고 살 생각은 없습니다.